인천국제공항을 품은 영종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세계와 연결하는 대표 관문도시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오가고, 공항을 중심으로 새로운 주거지와 상권, 산업시설이 빠르게 들어서고 있다.
하지만 ‘영종’이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이름의 뿌리를 따라가면 영종진에 닿는다.
2일 영종진 역사공원에서는 ‘제151주년 영종진 전몰영령 추모행사’가 열렸다.
행사장 한편에는 영종진의 역사를 6개 주제로 정리한 전시물이 설치됐다.
지금은 시민들이 산책하고 쉬어가는 공원이지만, 150여 년 전 이곳은 외세의 침입에 맞서 서해를 지키던 조선의 군사 거점이었다.
푸른 하늘 아래 세워진 영종진 전몰영령 추모비는 그 시간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의 공격으로 희생된 조선 수비대 35위의 넋을 기리는 공간이다.
영종이라는 이름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전기 영종포는 남양도호부 서쪽에서 경기 연안을 지키던 수군 거점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서해 방어체계를 강화했고, 1653년 효종 때 남양에 있던 영종포를 자연도로 옮겨 영종진을 설치했다.
이후 자연도는 영종진이 자리한 섬이라는 의미에서 점차 영종도로 불리게 됐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영종’이라는 지명의 뿌리가 바로 이때 만들어진 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종진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19세기 후반 조선 연안에는 통상을 요구하는 외국 함선들이 잇따라 나타났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했고, 1868년에는 독일인 오페르트 일행의 함선이 영종진 인근까지 접근했다.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까지 이어지면서 강화해협과 영종 일대는 조선이 서구 열강과 직접 맞닥뜨리는 최전선이 됐다.
수도 한양으로 향하는 서해 해상로를 지키던 영종진 역시 국제정세의 거센 파도 한가운데 놓였다.
그리고 1875년, 영종진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이 찾아왔다.
일본 군함 운요호는 서해안 측량과 식수 확보 등을 이유로 조선 연안을 탐색했다.
이후 강화도 초지진과 충돌한 뒤 영종도로 향했다.
같은 해 9월 일본군이 영종도에 상륙하면서 영종진 수비대와 전투가 벌어졌다.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서 조선군은 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지만 화력의 차이는 컸다.
포격과 교전이 이어졌고 군사시설과 민가가 피해를 입었다.
수비대원들도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영종진 전몰영령 추모비에 담긴 35위의 희생은 당시 전투가 남긴 상처를 보여준다.
전시 자료에는 영종진이 공격받던 당시 상황과 전투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기록도 소개됐다.
화염이 성안에 번지고 수비대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조선군은 끝까지 영종진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영종진에서 벌어진 비극은 한 지역의 전투로 끝나지 않았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는 주요 명분으로 활용됐고, 이듬해인 1876년 조일수호조규, 이른바 강화도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불리는 강화도조약은 이후 조선의 정치와 경제, 외교 질서를 크게 변화시켰다.
영종진에서 울린 포성이 결국 조선의 개항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전환점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운요호 사건 이후 조선 정부는 영종진을 재정비했다.
인천부를 방어영으로 승격하고 영종진을 이속하는 등 서해 방어체계를 다시 세웠다.
이후 영종진은 다시 설치되고 군사적 역할을 이어갔다.
그러나 조선 말기의 정치·군사 제도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영종진의 운명도 달라졌다.
1883년 방어영이 다시 영종진으로 옮겨졌지만, 1895년 개혁 과정에서 영종진은 폐지됐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옛 군영과 성곽의 흔적도 대부분 사라졌다.
지금 영종진 역사공원을 찾으면 당시의 성곽과 군사시설을 온전히 확인하기는 어렵다.
대신 영종역사관과 전몰영령 추모비, 일부 남아 있는 역사 흔적이 이곳의 과거를 전하고 있다.
151년 전 포성과 화염이 뒤덮였던 영종진 주변에는 이제 아파트와 도로가 들어섰다.
바다 위로 교량이 놓였고 인천국제공항을 중심으로 도시의 지형 자체가 바뀌었다.
과거 서해를 지키던 군사 거점은 이제 하늘길을 통해 세계와 대한민국을 연결하는 관문도시가 됐다.
공간의 역할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한 가지는 이어지고 있다.
‘문’이라는 기능이다.
조선시대 영종은 바닷길을 지키는 문이었다.
외세가 서해를 통해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막아서는 방어의 문이었다.
오늘의 영종은 세계로 나가는 하늘길의 문이다.
과거와 현재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영종이 사람과 물자, 문명이 오가는 길목이었다는 점에서는 묘한 연속성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종진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을 넘어선다.
영종구가 새롭게 출범하고 도시 개발이 본격화되는 지금,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을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영종진 역사공원을 단순한 근린공원으로 두기보다 지역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발전시키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학생과 주민을 대상으로 영종진 역사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을 연결한 근대사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한다면 영종진은 살아 있는 역사교육 현장이 될 수 있다.
영종진과 영종역사관, 구읍뱃터, 주변 해안의 역사 자원을 연결한 탐방코스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일수록 지역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은 중요하다.
새로운 아파트와 상업시설, 산업단지만으로는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영종’이라는 이름의 시작에는 영종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 속에는 바다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과 외세에 맞서다 희생된 35위, 조선이 근대사의 격랑 속으로 들어가던 순간이 함께 새겨져 있다.
영종진을 기억하는 일은 과거에 머무는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관문도시로 빠르게 성장하는 영종이 앞으로 어떤 도시가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기 위해 먼저 돌아봐야 할 출발점이다.
151년 전 포성은 멎었지만, 영종진이 남긴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영종’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으며, 그 역사를 앞으로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 답을 찾는 일이 이제 새로운 영종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첫걸음일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