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모밀로부터 시작된 조준형 셰프의 판모밀이 외식업계에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내고 있다. 백운호수 인근 9000평 자연 속에 자리한 ‘와싸라비아(Wasaravia)’는 국내 최초로 ‘와사비잎 쌈 삼겹살’을 내세운 힐링형 고깃집으로 오픈 한 달 만에 미식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 중심에는 ‘판모밀의 달인’이라 불리는 조준형 셰프가 있다. 그는 전통과 혁신을 융합해 후식 냉면이라는 익숙한 공식을 깨고, 삼겹살과 가장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판모밀을 탄생시켰다.
조 셰프의 외식업 경력은 3대째 이어지는 외식가문에서 시작됐다. 1954년 증조할머니가 광화문에 ‘미진’을 열며 모밀과 돌냄비 우동을 선보였고, 이 가게는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의 아버지는 충무로 동국대 후문에서 ‘꼭지분식’을 운영하며 분식과 찌개, 파전 등을 판매했고, 이후 1992년부터 ‘미진’ 이름을 다시 걸고 모밀과 돌냄비 우동으로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고모 역시 90년대 압구정동에서 퓨전 식당 ‘나오미’를 운영했다. 어릴 적부터 주방이 놀이터였던 조 셰프는 자연스레 외식업의 세계에 스며들었지만 한때는 배우의 꿈을 좇아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손예진과 동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폐암 투병과 코로나19로 인해 헬스트레이너로 활동하던 길을 접고 결국 외식업으로 돌아왔다. 2023년 시청 인근 푸드코트에서 판모밀을 선보였을 때 겨울 한파 속에서도 하루 150그릇이 팔리는 성과를 거두며 자신의 운명을 확신했다. 그는 아버지의 레시피를 젊은 세대의 입맛에 맞게 조정해 육수 원액과 물의 비율을 1:3으로 맞췄다. 이후 와싸라비아 오픈과 함께 메뉴 기획을 전담하며 고기 식사 후 냉면 대신 판모밀이라는 새로운 식문화를 만들어냈다.
조 셰프가 만들어내는 판모밀의 핵심은 면, 육수, 온도의 조화다. 국산 메밀과 진한 가쓰오부시 베이스 육수에 24시간 숙성 간장을 블렌딩해 깊고 깔끔한 감칠맛을 낸다. 삼겹살의 느끼함을 와사비잎으로 상쇄한 뒤 판모밀을 먹으며 입안을 정리하고 소화를 돕는 순환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육수는 전날 −12도에서 슬러시처럼 얼리고, 손님상에 나올 때는 1~2도로 유지해 최상의 맛을 유지한다. 육수는 하루 전부터 24~~36시간 숙성되며, 아침마다 냉장고 안 얼음을 슬러시처럼 깨서 균일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그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의 육수는 멸치, 다시마, 표고버섯 등 7~8가지 재료를 저온에서 36시간 숙성해 감칠맛을 만들어낸다. 단맛, 짠맛, 감칠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육수는 스프나 육수팩 대신 전통 방식을 고수해 만들어진다. 정확한 비율은 가문의 비밀로, 주말이면 재료가 동이 날 정도로 인기를 끈다. 조 셰프는 냉모밀과 판모밀의 차이도 강조한다. 냉모밀은 염도가 낮고 국물에 말아 먹지만, 판모밀은 염도가 높아 면을 찍어 먹는 방식이다.
와싸라비아에서 판모밀은 단순한 후식이 아니라 메인 메뉴로 자리 잡았다. 찬물에 삶아 탱글하게 살아난 메밀면, 36시간 숙성한 감칠맛 나는 국물, 얇게 채 썬 무와 와사비까지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산된 결과다. 고객층은 연인부터 가족 단위까지 다양하며, 육수까지 빈 그릇이 돌아오는 순간이 요리사로서 가장 보람된 순간이라고 그는 말한다.
조 셰프는 현재 디트럭(D Trucks) F&B의 이사로서 외식을 단순한 식사가 아닌 경험의 콘텐츠로 확장시키고 있다. 디트럭은 안성 광장휴게소 리모델링을 시작으로 의왕 백운호수에 와싸라비아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과거 방치된 고물 적치장을 리모델링해 자연, 공간, 음악, 사람을 연결하는 힐링 콘텐츠로 재탄생시킨 와싸라비아는 도시재생형 외식공간 모델로도 주목받고 있다.
그는 자가 제면소 도입을 통한 모밀 전문 브랜드 론칭을 목표로 삼고 있다. 반죽 농도, 숙성 시간, 수분 함량까지 제어할 수 있어야 진정한 모밀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현재 와싸라비아는 6구 해면기 2세트를 운용해 최대 12인분을 균일하게 삶고, 급속 냉수 헹굼으로 면발의 탄력을 유지한다. 삶은 면은 2초 내 냉수로 단련시켜야 텍스처가 살아난다는 철저한 온도 철학이 반영돼 있다.
면을 삶는 물의 온도는 98~100도로, 한 번에 삶는 양도 철저히 관리한다. 많은 양을 삶으면 물 온도가 떨어져 면발이 흐물거리기 때문에 두세 번 나눠 삶는다. 면을 뽑기 전 쯔유 숙성에도 24시간 이상을 투자하며, 사계절 따라 온도를 미세하게 조절하는 숙성 기술 역시 그의 비밀 병기다. 현재는 외부에서 아버지가 쓰던 면 굵기와 거의 비슷한 제품을 공급받아 사용하지만, 직접 제면 시스템을 구축해 장인의 맛을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조 셰프는 장기적인 메뉴 히트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모밀에 진심인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다. 계절 한정 메뉴, 자가 제면 시스템 도입 등 단계별 비전을 세워가며 준비하고 있다. 그는 “지금의 와싸라비아는 프롤로그일 뿐”이라며 언젠가 제면소부터 시작하는 모밀 전문점을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미진’이라는 가문 이름과 전통은 조 셰프에게 단순한 이력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아버지가 남긴 육수 비율 메모는 지금도 그의 PC와 휴대폰에 간직돼 있다. “아버지는 항상 우리가 만든 이 맛이 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3대째 외식업을 잇는 그는 전통적인 방식은 유지하되 현대적인 재료와 방법을 적극 수용해 시대에 맞는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젊은 장인 조준형 셰프는 가족의 기억과 시간을 한 그릇의 판모밀에 담아 오늘도 외식업계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