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생명이 베트남에서 갑상선암 진단으로 노동능력 81%를 상실한 고객에게 보험금 지급을 거절해 현지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보험 약관에 명시된 조건을 충족했음에도 ‘약관 해석상 조건 미충족’이라는 이유로 지급을 거부한 데 대해, 현지 시민사회는 “불명확한 문구를 근거로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를 외면한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노동능력 81% 상실에도 '조건 미충족' 판단
21일 베트남 현지 경제 전문지 트엉쯔엉(Thuong Truong)에 따르면, 문제의 고객은 베트남 푸토(Phu Tho)성에 거주하는 N.H.M 씨로, 2018년 한화생명 베트남의 ‘안강재정플랜(An Khang Tai Loc)’ 상품에 가입했다. 2025년 1월, 지방 건강검진위원회로부터 ‘분화형 갑상선암으로 인한 노동능력 81% 영구 손실’ 진단을 받은 뒤 보험금 청구에 나섰다. 이는 베트남 보건부와 노동부가 공동 발표한 법령에 따라 내분비계 질환 기준에 부합하는 장애율이며, 해당 보험 약관에서도 ‘공식 기관이 인정한 81% 이상 노동력 상실’을 전신·영구장애로 인정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화생명 베트남은 2025년 3월 회신에서 “계약서 제 1.32조에 정의된 ‘노동능력 상실’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해당 조항은 ‘의료기관 또는 지방감정위원회가 81% 이상 장애를 인정할 것’이라는 조건을 담고 있었으나, 정작 그 요건을 충족한 고객에게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은 것이다. 보험사는 이후 출근기록이나 업무배치표 등 추가 자료까지 요구하며 지급 결정을 미뤘다.
M 씨는 4월 4일 공식 이의신청서를 제출하며 “국가기관이 인정한 손실임에도 보험사가 자의적 해석으로 권리를 부정한다면 보험이란 제도의 신뢰는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항의했다. 그녀는 “약관에 추가 조건이 있다면 명시됐어야 한다”며 불명확한 계약 문구가 소비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M 씨는 2022년 개정된 베트남 보험법 제24조를 인용해 “약관이 불명확할 경우 보험계약자에게 유리하게 해석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그녀는 다수의 지인에게 한화생명 상품을 추천했으며, 그중 6명이 실제로 가입했다. 그녀는 “정작 나 자신이 피해자가 되니 배신감이 크고, 주변 가입자들도 모두 불안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지 언론과 시민단체는 이 사안이 단순한 개인 민원이 아닌 외국계 보험사의 책임과 공정성을 시험하는 사례라고 보고 있다. 트엉쯔엉은 “한화생명이 신속하고 투명한 해명을 내놓지 않는다면 이번 사건은 외국계 보험사 전반에 대한 신뢰 문제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내서도 반복된 구조…지급 거절률 1위
이번 사안은 한국 본사에서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생보협회 및 소비자주권시민회의 등에 따르면 한화생명은 최근 3년간 국내 보험금 지급 거절률이 1.04%로, 5대 생명보험사 중 가장 높았다. 전체 청구 건수 약 38만 건 중 약 4천 건이 지급 거절됐으며, 삼성생명(1.00%), 교보생명(0.95%)보다도 높은 수치다. 특히 지급 거절 사유의 상당수가 고지의무 위반이다. 2020년엔 전체 부지급 건 중 61.1%, 2022년에도 41.8%가 고지의무 위반을 사유로 들었다. 보험 가입 시 질병 관련 사항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더라도, 사후에 이를 입증해야 하는 책임은 가입자에게 지워지는 구조다.
보험금 청구 이후 해지율도 0.81%로 업계 평균(0.56%)보다 월등히 높아, 보험금을 받지 못한 고객들이 계약 자체를 해지하고 떠나는 현상이 뚜렷하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흐름이 단지 약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한화생명의 재무 구조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본다. 한화생명의 지급여력비율(K-ICS)은 2023년 1분기 173.1%에서 2025년 1분기 154.1%로 하락했다. 이는 금융당국 권고 기준인 150%에 가까운 수치로, 회사의 건전성에 경고등이 켜진 상황이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한화생명은 2024년 7월과 9월에 각각 신종자본증권 1.1조 원을, 같은 해 12월에는 후순위채 8000억 원을 발행하는 등 자본 확충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자본시장 대응이 보험사의 본질인 고객 보호보다 우선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약관 해석이 불명확할수록 보험사는 소비자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며 “지급 판단의 일관성과 투명성은 단지 계약 이행의 문제가 아니라, 보험사가 시장에서 신뢰를 유지하는 핵심 조건”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