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사업청이 한국형 차기구축함(KDDX) 사업자 선정 방식을 또다시 연기했다. 18일 사업관리분과위원회에서 결론을 내리려 했지만, 이틀 전 갑작스럽게 “상생협력 방안 추가 검토”를 이유로 안건을 취소한 것이다. 이미 국회 보고까지 끝난 사안이 돌연 보류되자, 국가안보실의 지시와 정치권 요구가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 뒤따른다. 업계는 미국과의 해양 방산 협력 구상(MASGA)과도 간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대형 프로젝트가 지연되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분위기다.
이번 연기는 단순한 절차 조정이 아니라 양사 모두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방사청은 당초 HD현대중공업이 선도함을 맡고 후속함에서 한화오션과 협력하는 절충안을 중재했지만, 안건 상정이 취소되면서 불확실성이 커졌다. 민간위원들이 수의계약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온 것은 사실이나, 안건 자체를 상정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는 게 업계 다수의 평가다. 결국 정치적 고려가 사업 일정에 개입하면서 조선소와 해군 모두 계획 차질을 피할 수 없게 된 셈이다.
기본설계 연속성에 따른 HD현대중공업 우위
절차상으로는 HD현대중공업이 유리하다. KDDX 사업은 개념설계, 기본설계,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후속함 건조 순으로 이어진다. 개념설계는 2012년 한화오션(당시 대우조선해양)이, 기본설계는 2020년 HD현대중공업이 수주했고, 지난해 12월 완료했다. 2024년 2월에는 합동참모본부에서 ‘잠정 전투용 적합’ 판정을 받으며 후속 절차 수행 자격을 확보했다. 원칙대로라면 이미 수의계약으로 상세설계와 선도함 건조가 진행됐어야 하지만, 정치적 변수로 일정이 1년 가까이 늦춰지고 있다.
한화오션은 HD현대중공업의 보안 감점 이력을 근거로 경쟁입찰 전환을 주장한다. HD현대중공업은 군사기밀 유출 사고로 1.8점의 보안 감점을 받았으나, 이 제재는 오는 11월 해제된다. 10월 말 재논의가 이뤄질 경우 HD현대중공업은 제재 종료와 함께 기본설계 수행업체라는 지위를 앞세워 사실상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된다. 따라서 입찰 방식이 바뀐다 해도 한화오션이 계약을 따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게다가 한화오션은 KDDX 개념설계 보고서 인용을 둘러싼 무단 활용 의혹으로 방첩사의 조사를 받은 바 있다. 조사에서는 일부 보고서 내용이 기본설계 제안서에 그대로 반영된 사실이 확인됐지만, 공소시효 만료와 법적 요건 미비로 사건은 ‘불입건’ 처리됐다. 방위사업청도 별도의 제재를 내리지 않으면서 법적 절차는 종결됐지만, 업계에서는 기술적 정합성과 신뢰성 논란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법적 책임 여부와 별개로 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한화오션은 개념설계 자료를 활용하고도 기본설계 수행 자격을 HD현대중공업에 내준 셈이어서 기술력 부족에 대한 의구심을 키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유용 논란 당시 한화오션은 “충실한 제안서 작성을 위한 자체 검토 과정에서 반영된 것”이라며 불법성은 없다고 주장했지만, 업계의 평가는 냉정하다. 특히 KDDX 선도함은 단순한 ‘첫 번째 함정’이 아니라, 후속함들의 기준이 되는 기술 사양이 집약된 결정체다. 다시 말해 선도함은 연구개발 역량과 기술 신뢰도가 모두 검증돼야 맡을 수 있는 사업이다. 2번함 이후 양산함들은 이 표준을 바탕으로 건조되기 때문에, 선도함을 누가 맡는가는 곧 국가 전력화 속도와 직결될 수 있다.
선도함 건조 경험 부족으로 드러난 한화오션 한계
이 점에서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격차는 분명하다. HD현대중공업은 이지스 구축함 분야에서 국내 유일하게 배치-Ⅰ, 배치-Ⅱ 사업 모두에서 기본설계와 선도함 건조를 수행하며 독보적 기술력을 확보했다. 세종대왕함과 서애류성룡함(배치-Ⅰ), 정조대왕함과 후속 2척(배치-Ⅱ)까지 일관되게 수주한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반면 한화오션은 율곡이이함 한 척을 건조한 경험이 전부다. 그것도 기본설계가 끝난 상태에서 생산 설계와 건조에 참여했을 뿐, 연구개발 성과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업계의 일반적 평가다.
따라서 방사청이 공동설계 방식과 같은 예외적 방안을 택한다면, 이는 방사청 출범 이래 기본설계 경험이 없는 업체가 상세설계에 참여하는 첫 사례가 된다. 절차적 정합성과 기술적 신뢰성 모두에서 우려를 낳을 수밖에 없으며, 결국 사업 지연과 전력 공백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 해군은 KDX-Ⅲ 배치-Ⅰ의 3척과 배치-Ⅱ의 건조 라인을 정상적으로 가동 중이다. 정조대왕함은 지난해 11월 인도됐고, 다산정약용함은 2025년 9월 진수 후 2026년 인도 예정이다. 세 번째 배치-Ⅱ 함정도 이미 건조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KDDX만 지연된다면, 차세대 전력화 일정은 최소 1~2년 더 늦춰질 수밖에 없다. 결국 “한화오션의 기술력을 담보할 수 있느냐”는 물음은 단순한 기업 간 수주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해군 전력 강화와 국가 안보의 현실적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